함께 싸우자 [무늬] 일상의 인문학

Ben Folds - Still Fighting It



오산천 지도를 그리며


  '화이팅'(fignting) 혹은 '파이팅'(앞으로는 파이팅이라 부른다.)이라는 말이 싫어졌다. 예전엔 그 말이 부담없는 응원이나 함께 하자는 의미로 들렸지만, 언어란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고 오늘 내게 파이팅이란 말은 이젠 비아냥이나 지구 만큼의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근 내게 계속 화이팅이라며 비아냥 거리는 한없이 짜잘해보이는 양아치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보다 경쟁을 자극하고 더 자기 착취를 강요하지 않는가. 그 무게 때문에 힘내라는 말조차 버겁다. 언젠가부터 그 말을 하기도 힘들고 듣기도 힘들어졌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당위로써 싸워야할 구체적 대상이 사라진 시대에서 보이지도 않는 적과 도대체 언제까지 힘내고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 그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제는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지능과도 일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지 않은가.
  존 트라볼타가 출연한 영화 『마이클』(Michael, 1995)이 떠오른다. 천사 마이클은 파이팅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배틀'(battle)을 말한다. 파이팅과 배틀, 어쩌면 단어만 두고 보면 배틀이 더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영화 속에서 배틀의 의미는 가볍게 다가온다. 내게 다가온 천사 마이클의 배틀은 타인이 만든, 혹은 타인에게 보여지는 가면을 벗어낸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라는 뜻이었다. 둘 다 우리말이 아닌 영어가 판을 치는 한국에서 둘을 가지고 논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스운 일일지 모르지만, 일상은 그리 가볍지도 아주 단순하지도 않기에 말은 아주 중요하다.
  어제 JTBC 뉴스룸 엔딩에는 벤 폴즈(Ben Folds)의 「Still Fignting It」이 흘러나왔다. 손석희는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시민의 목소리를 폴즈의 목소리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것 같았다. 폴즈 역시 그것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진 않았지만 보다 나은 삶을 방해하는, 평화를 억누르는 그것과의 싸움을 가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자신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주고자 하는 싸움은 명예롭고 기억할 만하다. 비록 그 싸움이 폴즈의 노랫말처럼 더럽거나 추악할지라도 말이다(도대체 sucks를 어떻게 번역해야 한단 말인가, 그냥 '엿같다', '딸랑인다', '물고 빤다'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순화시켰다.). 싸움은 항상 고통을 동반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또 싸워야 한다. 내 행복에만 안주하고 타인의 불행에 눈감는다면 싸움은 끝까지 멈추지 않을 게 분명하다. 싸움을 멈추는 순간 노예는 진짜 노예가 되고, 우리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사는 관료에게 개 돼지라 불리는 시민은 진짜 개 돼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싸움은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부조리를 짊어지는 연대를 통해 반복되어야 한다. 안타까움 또는 측은지심을 통해 만들어진 연대는 쉽게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질 거다. 어쩌면 그 싸움의 가장 큰 대상은 비겁한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 무엇보다 자신과의 대면(對面)이 무서운 이유다. 또한 그래서 싸움은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싸울 대상이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비겁하고 치졸한 상대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때론 흙탕물을 피하려다 누군가 싸지른 똥을 밟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긴다 해도 보람없는 경우가 많고 한 세대에서 결판나지 않는 장기전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똥이 무서워 피하냐고 더러워서 피한다고 말한다. 때로 어떤 싸움은 피하는 게 나을 때가 있다. 하지만 정작 싸워야 할 때, 나의 생존 뿐 아니라 자존감, 심지어 어린 아이들의 성장을 막아버리는 대상과는 싸워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더럽더라도 말이다.

  불과 며칠 전 저녁, 내게 이런 말을 한 사내가 있었다. "대통령의 사생활까지 까발리는 손석희 그 새끼나 다른 언론이나 다 썩었어요··· 대통령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전라도 사람들은 절대 믿지 마세요, 전라도 놈들은 겉과 속이 다른 사기꾼이에요··· 어쩌구 저쩌구." 하는 신념에 가득찬 그의 번뜩이는 눈빛을 보며 나는 그와 싸울 수는 없었다. 그저 그에게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정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스포츠 토토 배팅 때문에 빚이 5억이 넘는다는 그 사내는 당장 며칠 후에 결제할 신용카드 대금을 잠깐만 빌려줄 수 있느냐고 내게 정중하게 물었다. 내게 잠시 돈을 빌리자는 그의 손에는 아직 확인하지 않은 복권이 뭉텅이로 들려 있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생은 한방이라는 그 사내가 내가 빌려달라는 돈의 액수는 아마 그의 손에 들린 확인하지 않은 복권만큼의 금액이거나 아니면 두 배 정도 되었을 거다. 나는 정중히 나의 사정을 말하며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내 거절을 들은 사내의 한숨 소리가 안타까웠다. 빚을 지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토토 투자금으로 이천만원을 빌려주었다는 그 사내, 사내는 자신에게 돈을 빌린 사람이 청담동 집을 팔면 급한 불은 끌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사내가 빌려주었다는 그 사람은 청담동 집 주인의 아들이지 집 주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어찌 팔아서 빚을 갚겠다는 말인가. 어쩌면 내 걱정과 달리 사내는 내일 당장 대박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엔 그의 대박이 다시 또 빚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사내와 내가 가까운 사이라면 어떻게라도 할 텐데, 사내와 나는 대면하고 말한 지 10분도 안 된 사이였다. 사내의 이름과 그의 겉모습은 오랫동안 봐왔지만 속내는 그날 처음 봤다. 사내의 싸움이 어떻게 계속될 지 나는 모른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몇 년 뒤면 반 백살이 되는 사내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쨌든, 혹은 어쨌거나.

  어쨌거나, 누구거나 어느 시대거나 어느 장소에서나 싸움은 항상 장기적이다. 프랑스 혁명은 한 번 일어나지 않았으며 혁명 후에도 싸움은 계속 되었고 그들이 만든 인권은 그들을 제외한 사람에게는 논외였다. 결국 바람을 가르는 폴즈의 새처럼 우리의 날개짓은 얼마 짜리로 평가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노예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부디 우리의 촛불이, 자신과의 싸움이, 그것과의 싸움이, 박근혜와 그의 무리들에 저항하는 우리의 싸움이 시대를 지나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과 믿음이라는 걸 바랄 뿐이다.
  부디 평화롭게, 부디 물대포와 최루탄이 아니라, 부디 스물 언저리를 넘나드는 청년들(의무경찰)에게 곤봉과 방패를 쥐어주는 일이 없기를, 거리에 총과 피가 아니라 따듯한 촛불로 가득하길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에 아픈 우리의 싸움에 또 다른 고통이 더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박근혜와 그의 일당들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더라도 남녀노소가 들고 있는 촛불 앞에 두려워 하길 바란다. 광장에 나가지 않은 시민들이 비록 촛불을 들고 있지 않지만 시민들의 가슴엔 횃불이 타오르고 있음을 알길 바란다.
  무슨무슨 이름으로 일당 몇 만원을 쥐어주고 명예로운 퇴진을 얘기하게 만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치를 안고 파이팅을 외치게 하는 슬픈 시대가 끝나길 바란다. 주머니는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이 넉넉해지는 희망을 안고 살 수 있게 되길, 헌법에 명시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346회 국회 정기회 12차 본회의 중 이재정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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