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를 잊는 방법
기억이 사라지고 추억이 사라지면 그 추억 속에 담긴 사람도 함께 사라진다. 사람을 가장 빨리 잊는 방법은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을 잊는 것이다. 그의 냄새, 그의 소리, 그와 함께 한 공간들,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 순간, 사람은 사라진다. 그의 존재는 너무나도 가벼워져서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것이다. 사자를 잊는 방법도 이와 동일하다. 반대로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를 기억하라. 기억하는 그 순간 사라진 사람은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때론 천사처럼, 때로는 악마처럼. (2006. 3. 19)
사자와 함께 데카르트의 cogito 고민하기
데카르트(Decartes)와 사자가 만난 건, 지난 일요일이다. 둘은 서로를 본 순간, 고민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는 사자가 학문의 원리를 모른다고 생각했고, 사자는 데카르트의 토대가 부실하다가 생각했다. 사자가 데카르트에게 물었다.
"당신은 기존의 학문이 올바른 방법 위에 서 있지 않다고 비판하며, 자신의 학문의 방법은 올바르고 굳건한 토대를 세우는 데 기여할 거라고 말했죠?"
"어이, 사자가 말을 하네? 이건 분명 악마의 농간이야."
"허, 참. 사자가 말을 하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나?"
"이것 봐. 감각은 정말이지 헛된 거야. 난 나의 사유함만 믿겠어."
"이봐. 내가 당신을 잡아먹어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사자는 자신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내밀었다. 하지만 여전히 데카르트는 사자를 부인했다.
"네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꿈을 꾸기 때문이야."
"그럼, 그 꿈에서 깨시지."
"아니, 난 그럴 수 없어. 난 신이 아니야."
"당신이 신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당신은 인간이지. 그리고 데카르트이고. 당신은 사유하는 존재야.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너나 나나 우리는 모두 1인칭과 3인칭을 가지고 있어. 너 홀로 1인칭이라고 생각하지는마. 내게도 자아가 있거든."
"그럼, 사자 너도 의심하는 네가 있다는 거냐?"
"당연하지. 난 의심하는 내가 있고, 그에 앞서 내겐 육체가 있어. 네가 기계라고 부르는 그 신체 말이야."
"하지만, 난 너를 부인하고 싶은 걸."
"데카르트! 그건 당신의 욕망에 불과해."
"내가 단지, 욕망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 몸 없이 네가 사유한다는 것 자체가 학문의 원리를 잘못 세우고 있는 거야. 원리의 방법에 있어, 넌 배제해서는 안될 것을 배제했어."
"아니야. 난 내 토대를 세웠어."
"과연, 너는 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넌, 사기꾼에 불과해."
"아니야. 난 사기 친 적 없어."
"네가 정말 학자라면 네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해. 네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하지는 마. 만약 네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네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한다고 말하라고."
말을 마친 사자는 데카르트를 꿀꺽 한 입에 삼켜버렸다. 데카르트의 목소리는 그 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사자가 트름을 했다. 꺼억~ (2006. 4. 13)
내가 널 기억하는 동안에는 잠시 쉬어도 돼. 그래도 괜찮아.
"사자씨! 너무 힘들어 쓰러지고 싶을 때가 있어. 특별한 이유도 사건도 없었는데 눈물이 앞을 가릴 때가 있어. 누굴 만나도 즐겁지 않을 때가 있어. 아무런 아쉬움도 없을 때가 있어. 습관처럼 굳어버린 것들을 지나쳐버릴 때도 있어. 그렇게 힘들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무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 난 어떻게 해야지? 이젠 어느 것도 내 심장을 떨리게 만들지 않아. 이러다가는 단단하게 굳어버려 내 피까지 굳어버릴지 몰라."
"그렇지. 그럴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사랑을 해봐!"
"하지만, 난 지금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걸."
"그럼, 가만히 가만히 쉬어봐! 항상 무언가에 집중할 필요는 없을런지 몰라. 가끔 너를 놓아두고 무거운 세상도 내려두고 눈을 감고 볼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무시하고, 쉬어봐."
"가볍게?"
"그래, 넌 조금 더 가벼워져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러다 날아 가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좋지 않을까? 날아갈 수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넌 날아가지 않을 거야. 내가 널 기억하고 있을게. 네가 사라지지 않도록. 그러니 모든 걸 놓아두고 잠시 쉬어봐! 그래도 괜찮아."(2008. 4. 19)
그 무수한 상처에 대하여
밤새 눈이 쌓여 길이 사라질 정도였다. 창문을 열 수 조차 없을 만큼 창밖까지 눈으로 덮였던 그해 겨울, 나는 눈동굴을 만들어서 옆집에 사는 사자를 방문했다.
"휴, 눈이 너무 많이 쌓였어. 이런 눈은 정말이지 처음이야."
"그렇지.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줄까?"
사자가 내게 따뜻한 커피와 함께 비스킷을 건냈다.
"그런데, 사자 너에게는 상처가 없는 것만 같아. 평소에 내게 하는 말만 들어도 그런 것 같고."
"그런 것 같아? 너는 내 갈기 밑에 숨겨진 무수한 상처가 보이지 않는가보지?"
"내게 보이는 건 너의 황금색 갈기뿐이니까."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상처가 없는 건 아니야. 상처가 많을 수록 그것들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럼 사람들에게 당신의 상처가 어디냐고 물어야 하는 걸까?"
"그렇진 않아. 세상이 온통 흰 눈으로 덮였다고 그 아래에 길이며, 강이며, 산이 없는 게 아니듯 상처 없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난 무얼하면 되는 걸까?"
"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아직 그게 무언지 모르거든 네가 가장 재미있는 일을 하면 될 거야. 너의 자리에서, 지금 당장!"(2008. 2. 20)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하루종일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사자에게 물었다.
나: "사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뭘까?"
사자: "그나저나 오늘은 하루종일 비만 내리는구나. 이 땅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비가 내리는구나."
사자는 묻는 얘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얘기를 한다.
나: "이렇게 비가 내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거잖아. 비가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어."
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냐고?"라고 되물었다.
나: "응, 난 그게 궁금해."
사자: "그렇구나, 넌 무엇이 가장 무서운데?"
나: "글쎄, 예전에는 골목길에서 부딪힐 수 있는 깡패들과, 사막에서 우연히 부딪칠 수도 있는 사자가 가장 무서웠어. 하지만 이젠 사자와 친구가 되었으니, 사자는 무섭지 않아." 라고 말하며 나는 그의 갈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사자: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무서워할까?" 사자는 아까부터 계속 대답하지는 않고 되묻기만 한다.
나: "사람들은 아마 돈을 가장 무서워하지 않을까?"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사자는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돈 1억을 주면 무서워할까?"라고 말했다.
나: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아마 좋아서 폴짝폴짝 뛸 걸!"
사자: "그럼, 막연히 돈이 가장 무서운 건 아니네."
나: "웅, 하긴 그래. 돈이 가장 무서운 건 아니지. 그럼, 귀신일까?"
사자: "귀신? 넌 귀신이 있다고 믿는 거야?"
나: "믿지는 않지만, 무서운 걸."
사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걸 왜 무서워 하지?"
나: "난 알 수 없거든."
사자: "그렇다면 알 수 없는 건 무서운 걸까?"
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은 대개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 해. 죽음도 그렇고."
사자: "어차피 죽음이란 죽음 이후에나 알 수 있는 거야. 넌 내게 죽음 이후의 것 중에서 가장 무엇이 두려운지를 물은 거야?"
나: "아니, 그건 아니야. 정확한 내 질문은 '지금 이땅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냐는 거야."
사자: "이제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구나.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습관이야."
나: "습관?"
사자: "응, 맞아. 습관! 습관은 중독이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본능적으로 습관을 갖게 되거든."
나: "습관이 무섭다는 말은 처음 들어."
사자: "아니, 처음은 아닐 거야. 텔레비전에 중독된 인간들, 사육사가 던져주는 죽은 고기에 중독된 사자들, 이 모든 것이 습관이야. 돈돈돈 물신에 중독된 인간들. 예전에는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없이 살았으면서 이제는 에어컨이 없는 공간에 가면 죽겠다고 죽겠다고 습관처럼 내 뱉는 말들. 습관처럼 배어버린 진심 없는 안부들. 이 모든 게 습관이야.”
나: “그렇다면 난 예전부터 습관에 찌들어버렸는 걸.”
사자: “맞는 말이야. 우리 모두는 습관의 노예지. 육식의 노예, 채식의 노예. 사랑이 뭔지도 몰랐으면서 사랑도 해본 적 없으면서 사랑에 중독된 인간들, 사랑을 해봐서 누군가에게 익숙해지는 사소한 것들, 사소한 사건들, 사소한 기억들, 하지만 절대로 사소하지 않은 것들. 태어나서 외로움이 뭔지도 몰랐으면서 외로움이라 부르는 것들. 이 모든 것들.”
나: “습관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사자: “맞아.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습관은 희망이야. 그 누구도 죽는 순간까지, 죽어가면서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아. 죽는다면 고통이 사라질 거라는 희망, 누구도 알 수 없는 희망. 가장 무서운 습관. 살아 있다는 건, 습관 속에서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거야.그게 바로 가장 무서운 거야.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나: “내가 가진 것은 이 만큼인데, 난 항상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언젠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희망해.”
사자: “그래, 그래서 넌 숨 쉬고 있는 거야. 살아있기 때문에. 습관 때문에.”
나: “난 계속 숨 쉬고 있을 거야.”
사자: “그래, 너도 나도.”
숨쉬기 운동,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2007. 7. 8)
사자, 날다
스핑크스 알아? 스핑크스처럼 원래 사자에게는 날개가 있었어. 오이디푸스 때문에 그 날개가 꺾이긴 했지만 말이야. 원래 사자는 날아다녔던 거야. 뭐라고? 그럼 사자는 조류냐고? 니가 보기에 내가 닭으로 보여? 조류가 아니라, 날아다니는 사자인 거야. 하지만 지금 세상은 날개가 필요가 없어. 설령 날개가 있다고 해도 필요 없는 것은 퇴화될 테니까. 내가 가진 건 무엇이든 물어 뜯을 수 있는 튼튼한 어금니와 송곳니야. 그리고 이 날카로운 발톱까지. 그래도 네가 굳이 사자가 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한 번 정도 날아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 등에 숨어 있는 날개를 꺼내야해.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꼭꼭 숨어버린 날개를 말이야. 자, 보여?이게 바로 사자의 날개야. 볼 품 없다고? 날 수만 있으면 되지 어떻게 생기든 무슨 상관이야. 자, 이제부터 날 거야. 똑똑히 봐야해.
사자, 날다. 하지만 누구도 사자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의 눈에 사자의 나는 모습은 껑충 땅 위로 도약했다가 다시 땅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명, 결단코, 사자는 날았다. 날개가 없는 그대도 날 수 있다. 자, 껑충, 뛰어오르자. 껑충!(2007. 8. 3)
타인의 취향
사자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에게는 과거가 있고 추억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에는 사자가 있다. 사자가 떠올리는 추억 속에는 사자가 있다. 그는 모든 경험에서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사랑도, 삶도 사자에게는 사자의 사랑이, 사자의 삶이 있다.그 속에서 사자는 살아있다. 그가 떠올리는 모든 과거는 무지개 빛깔로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사자가 떠올리는 과거가 아닌, 사자의 과거 속에서 사자는 언제나 타인일 뿐이다. 사자가 금남로 거리를 걷는다. 거리를 걷는 사람마다 자신의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의 과거는, 자신의 과거가 아닌 타인의 추억으로 남는다. 타인의 취향, 타인의 바램 속에서 거리를 뛰어다니는 좀비들을 보며 사자는 눈물을 흘린다. 사자는,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어려운 일은 타인의 삶을 사는 일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각자 타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곳에는 이타심이 없다. 하지만 이기심도 없다. 나 없는 이기심.얼마나 고상한 현대인의 취향이란 말인가. 얼어죽을, 이라고 사자가 말한다.(2007. 4. 29)
가볍게 가볍게
중력은 느끼려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의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어. 굳이 중력을 의식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야. 가볍게 가볍게 사는 것도 좋아. 어쩌면 지구 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하지는 마. 너는 공기보다는 무겁고, 바위보다는 가벼우니까. 아무도 바위가 지구 밖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거든. 넌 그저, 한 곳에 머물러 살지 말고, 너의 두 다리로 무수한 꼭짓점을 만들며,옮겨 다니면 돼. 너의 사건, 하나하나가 추억이 되고, 힘이 되고, 때론 슬픔이 될 거야. 기쁨일 거야. 세상에 우여곡절이 없는 인생은 없어. 너의 추억을 건조하게 만들지는 마. 그 속에 기억할 만한 건 아무 것도 없을 거야. 너의 기억 속에서 짠내가 날 때, 기억은 추억이 되는 거야. 불쑥 불쑥 솟아나서 너를 괴롭히기도 하겠지. 하지만 때로는 너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힘내라고 말하는 것도 추억이야.잊혀진 것이 아니라, 결국 만들어 가는 추억. 너는 살아 있으므로 중력 속에서 말하는 존재야. 살아! 즐겁게, 가볍게 가볍게. 날아갈 것처럼.(2007.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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