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1월 04일
2012년 시작
# by | 2012/01/04 05:01 | 흔적(09년 이후) | 트랙백 | 덧글(1)
# by | 2012/01/04 05:01 | 흔적(09년 이후) | 트랙백 | 덧글(1)
사실 아직 다 읽은 건 아니에요. 30쪽 정도 더 읽어야 해요.
간만에 좋은 책 읽었다 싶어요. 요즘 제가 하고 있는 일 중 하나-(?)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를 하면서 회의가 들곤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래도 하나 좋은 점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책이에요.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이 책을 서점에서 찾고, 읽는 일을 하지 않았을 거에요. 누가 추천해 준 것도 아닌데 우연히 집어 들게 되었어요.
제목 그대로 자연관찰 일기에요. 번역이 잘 되어 있고요. 그림들도 좋아요. 이 책을 보면서 자연관찰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어요.
꼭 거창하게 환경운동을 하지 않아도 좋아요. 일상의 모습을 글 뿐 아니라 그림으로 넣어서 기록해도 좋겠어요. 이 기록을 작성할 때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치유한다는 생각으로 한다면 더욱 좋을 것 같고요. 이 책을 읽으며 선생님들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진명샘, 강샘, 지선샘, 인영샘, 선혜샘, 도현샘까지 두루두루 생각나더군요. 샘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분위기까지요.
그림, 그리고 음악. 저는 글은 쓰지만-그것도 잘 쓰지도 못하지만-그림이나 음악에는 영 젬병이거든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부러워요. 그만큼 세상을 더 폭 넓게 보고 듣고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요즘들어 직업적으로 하천을 돌아보는데요, 일이라 때로는 고될 때도 있지만 풀과 나무와 석양을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면서 알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고요. 이 책을 보면서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어요. 한 때 일기를 쓰면서 그림도 그리던 때가 있었잖아요. 어렸을 땐 한 쪽 밖에 없는 그림 일기장이 좋으면서도 싫기도 했어요. 방학을 지내고 개학이 다가올 때, 일상이 늘 똑같다고 느낄 때는 한 쪽이 좋았어요. 그리고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한 쪽만 있는 일기장이 싫었어요. 정말 많은 것들을 다 그리고 다 쓰고 싶어도 네모를 넘을 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꼭 한 쪽 안에 다 그릴 필요도 다 쓸 필요도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이 책을 읽으며 어른이 되어 다시 그림 일기를 쓰고 싶어졌어요. 혼자 볼 수도 있지만 함께 볼 수 있는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만약 저에게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와 함께 그리고 써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따로 써도 좋고요.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도 좋지만 그림으로 그 특별한 날들을 인화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어요. 어느 한가로운 날의 햇살을 그려도 좋고요, 요즘 같이 스산한 바람이 부는 날 풍경도 좋고요. 잠에 빠진 고양이나 목욕을 끝내고 물기를 털어내는 강아지의 모습도 좋고요. 단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주, 한 달 성장하는 나무나 아이나 꽃이나 반려 동물도 좋겠어요.
# by | 2011/10/18 00:21 | 독서/스크랩 | 트랙백 | 덧글(2)
오늘, 이 바람이 수상하다.
2011년 9월 30일. 새벽 5시부터 오전 9시까지.
지금 이 바람이 수상하다.
정확히 나의 시계로 1993년 3월 14일, 1993년 9월 20일 정도에 불었던 바람과 일치한다.
그 때 느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과 어쩌면 이토록 일치할 수 있을까.
이상하다.
그렇다고 해서 서른다섯의 내가 열일곱이 되는 것도 아닌데.
시계가 거꾸로 가는 듯한 느낌. 하지만 나의 육체는 여전히 낡고 있는데.
과거로 돌아가서 과연 어쩌자는 말이냐.
# by | 2011/09/30 08:49 | 흔적(09년 이후) | 트랙백 | 덧글(0)
# by | 2011/09/02 23:06 | 흔적(09년 이후) | 트랙백 | 덧글(2)
# by | 2011/07/22 00:00 | 미분류 | 트랙백 | 덧글(0)
| 김태우의 오산천이야기_41)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연재를 마치며 | |||
| 김태우의 오산천 이야기 | |||
2000년까지 꼬박 5년이 남은 해였다. 하지만 우리는 20년이 되기도 전에 그 꿈과 희망을 잃어버렸다. 세기가 바뀌기도 전이었다. 타임캡슐을 묻어둔 그곳만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개발되거나 파헤쳐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곳에 길이 뚫리고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대학 진학과 군 입대 때문에 누구도 그곳이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돌아온 고향에서 우리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언제나 그대로 있을 거라고 생각한 공간이 이미 변할 대로 변해 버린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열아홉의 친구들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런 고물가 시대에는 은행이자가 수익률이 낮다며 주식과 땅값을 이야기한다. 그 꿈 많던 친구들도 변해 버렸다. 꿈의 단일화. 소원의 단일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부자’가 되었다. 오산천은 이 모든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이 물장구 치고 가재와 다슬기를 잡던 하천은 복개되어 그 위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섰으며, 사람들은 이제 그 기억마저 잃어가고 있다. 이 모든 변화를 탓할 수는 없다. 살아있는 것은 어떻게든 꿈틀거리며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변화가 누군가를 소외하거나 배제하는 변화여서는 안 된다. 지난 세월 오산천은 소외와 배제의 대표적 산물이었다. 이름을 가지고 있던 하천은 이름을 잃었으며, 어떤 하천은 아예 폐쇄되어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사라진 공간에서 우리는 어떤 경험도 할 수 없다. 삶은 어느 특정한 공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공간이 삶의 공간이다. 집과 거리와 직장에서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고 있을까. 일하고 놀고 쉬는 공간이 있다고 할 때 우리의 집과 거리와 직장은 어떤 공간인가. 왜 사람들은 휴가철이 되면 산으로 바다로 떠나야 할까.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왜 사람이 붐비는 공간으로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떠나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그곳에 축제가 있어서? 아니다. 내 삶의 공간이 휴식을 취하기에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오산천은 우리 삶의 공간이지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는 관상의 대상이 아니다. 과연 오산천은 우리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공간인가.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나의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일상의 경험은 소중하다. 일상의 경험이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은 조금 위험하다. 창의성과 다양성이 중요하다면서 획일화 시키려는 헛소리가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ㆍ중ㆍ고 12년 동안 입시교육에만 매달려 있는 기이한 현상이 어디에 있을까. 헛소리가 넘치는 세상에 그 헛소리에 매달리다 보면 나의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군가의 경험을 따라가기 급급한 삶, 내가 설정한 나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경험은 너무나 공허하다. 자연의 빛과 색을 잃어버리고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에서만 색을 인지하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나는 오산천을 돌아다녔지 다른 하천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내가 다니지 못한 길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어떻게 보존하고 소위 ‘지속적 발전’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 아이들과 어른이 어울려 함께 물장구를 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느냐, 아니면 그곳을 개발해서 도로와 건물을 만들고 몇 시간 동안 자동차를 타고 산과 바다에 찾아가 산과 바다가 아니라 인산인해를 발견하느냐 역시 우리의 몫이다. 오산천은 요즘 또 다른 변화에 직면해 있다. 자전거 도로는 좋다. 맑음터공원에 있는 전망대도 좋다. 하지만 무조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어, 지금의 어른을 욕하지 않을 도로를 만들고 건물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귓구멍이 뚫려 있다고 해서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들리는 귀는 독선과 아집만 키우는 귀다. 빠르게 도로를 만들고 건물을 지을 사람에게 이 일은 쓸데없는 일로 보이거나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밥 사주고 욕먹지 말라.”는 옛말처럼 좋은 일을 하고 질타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바보 같은 일도 필요하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내 입맛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경청하고 배려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내내 오산천을 돌아다니며 가장 괴로웠던 일은 사람들이 내게 왜 이 일을 하느냐고 묻는 질문이었다. 먹는 일에 도움도 되지 않고, 들어줄 사람도 없는 일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의문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천을 돌아다니며 아무도 없는 땡볕에 기절하기도 여러 번, 불법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일쑤였다. 몇 번이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오산천을 점점 더 알아갈수록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러기를 햇수로 3년. 2005년에야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기록을 책으로 내기는 요원한 일이다. 5년 전, 이 글의 가치를 알고 있다며 꼭 내야 한다고 말했던 염○○ 선배는 자기 뱃속을 불리기 위해 후배인 내게 사기를 치려고 했다. 그랬다,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당시의 오산은 그랬다― “형, 어디에 있소? 제발 부탁하건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이라도 해주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2009년부터 오산시민신문에 ‘김태우의 오산천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오산천의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기록을 연재라는 형태로 마감했다. 그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하천의 지류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있었던 것이 사라지기도 없었던 것이 생기기도 했다. 하드 한 구석에 박혀 있던 원고를 연재하면서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2011년 현재의 오산은 2005년의 오산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 새로운 오산천의 모습을 찾아 걸어야만 하는 일이 과제로 남은 셈이다. 그 길, 옛날에는 혼자 걸었다면 이제는 함께 걷고 싶다. 묵묵히 2년간 과거의 오산천을 함께 걸었던 오산시민신문의 독자와 오산시민신문에 정말 감사드린다. 김태우 작가 | |||
| 기사입력: 2011/06/07 [18:43] 최종편집: ⓒ 오산시민신문 |
# by | 2011/06/09 03:14 | 오산천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 40)여덟 번째 이야기-오산을 걷다(3) |
| 김태우의 오산천 이야기_오산로에서 화성시 정남면 보통리까지 |
| 오산로에서 화성시 정남면 보통리까지 오늘 빗재가마 김용문 씨의 ‘도자기전 100년의 시’ 뒤풀이가 있다. 그는 얼마 전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주최하고, 한국민족예술총연합에서 후원한 이 전시회는 일주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오늘 드디어 막을 내렸다. ‘생명과 생명의 경계를 차단하는’ 시비(詩碑)가 아닌 흙에 새기는 시와 도예의 조화로운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땅거미가 지는 때 이른 저녁, 오산 시장에서 이원규 시인을 만났다. 이원규 시인이 내주는 커피에는 장사익의 음율도 함께 담겨 있는 듯, 목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움이 예사롭지 않다. 뒤풀이는 정남면 보통리에서 열린다고 했다. 대원약국 앞에서 301번 버스에 오른다. 퇴근시간인 듯, 버스는 앉을 자리 하나 없이 빼곡하다. 흔들거리는 버스는 궐동을 지나 수청동을 지나 어느덧 예비군훈련장 입구를 지나 병점에 도착한다. 아주 많이 막히지는 않았지만 퇴근시간인지라 병점에 도착할 때 이미 태양은 서산 아래로 자맥질하고 있었다. 길을 건너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가게에 들러 껌 한 통을 사면서 보통리 가는 버스가 몇 번이냐고 묻는다. 묻자마자 24번 버스가 코앞에 서 있다. 이원규 시인과 함께 보통리로 가는 길, 그의 이십대 후반이 어떠했는지 묻는다. 그 역시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걸 느끼며 차창을 내다보는데,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창밖 풍경은 온통 어둡다. 어느덧 도시에서 시골로 접어든 것이다. 초행길, 버스는 용주사를 지나 융건능 앞에 우리를 두고 유유히 사라진다. 이제 보통리 저수지를 찾는 길만 남았다. 융건능 앞에서 길을 건넌다. 작은 가게에 들러 보통리 저수지로 가는 버스가 있느냐고 물으니, 버스가 자주 오지 않는다고 한다. 걸어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이원규 시인과 나는 결국 발걸음을 옮긴다. 밤길을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 보통리 저수지. 다행히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건축가 최완의 작업실 <天ㆍ人ㆍ土>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보통리 마을로 접어드는 길, 드넓은 보통리 저수지의 모습이 마치 바다 같다. 건축가 최완의 작업실은 수원전문대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작은 앞마당이 있는 그의 작업실은 오래된 초가집에 양철 지붕을 올리고 있다. 비라도 내리신다면 호도독, 호도독 귀를 때리는 소리에 가슴이 들뜰 것 같다. 마당에는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피운 모닥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저녁이면 조금은 쌀쌀한 이 때, 이곳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이미 막걸리를 들이키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도예가 김용문을 만난다. 머리 위로 틀어올린 그의 상투머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이제 보통리 사람으로 살게 된 지 두 달이 되었다는 주름진 얼굴의 사내가 옌벤(延邊)에서나 볼 수 있는 양고기 꼬치를 내온다. 샹차이(香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느덧 사람들은 술이 오른 듯 사랑방으로 오른다. 전시를 끝낸 작품들이 방을 빙 두르고 있다. 백석 시인의 시부터 신경림 시인의 시를 포함해 많은 작품들이 여러 색깔의 빛을 내며 자리 잡고 있다. 모두에게 막걸리 한 사발이 돌아가고 이번 행사를 무사히 성공리에 마친 김용문, 손영익, 고선례 도예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화성시 정남면 괘랑리에 살고 있는 이덕규 시인의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뒤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용문 씨가 이덕규 시인의 ‘화성火星에서 보내온 사진 한 장’을 읊는다. 사랑의 또 다른 의미를 이야기 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곧이어 이원규 시인의 [못 줍기](들꽃사랑, 1998)가 낭송된다. 함부로 버려지는 것들까지도 가슴으로 품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시가 있으면 음악이 있는 법, 이덕규 시인과 고향이 같다는 현재 수원에서 활동하는 임상혁 씨가 기타를 들고 의자에 앉는다. 은은한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보통리의 밤은 더욱 깊어만 간다. 내 옆자리에 앉은 손일선 씨와 잔을 부딪치며 저염식의 된장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경기도 북부 연천군 군남면에 있는 한국자연생태과학교육원의 원장으로 있다고 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이규황 시인이 생전에 평소에 이야기하던 “나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과 일치할 때만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말이 담겨 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이야기에 한참 빠져 있을 때, 화성시 동탄면 산척리가 고향이라는 사진작가 윤태서 씨의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온다. 뒤이어 감성음악 작곡가로 수원에서 활동하는 최병두 씨의 피아노가 하모니를 이룬다. 최병두 씨는 현대인의 귀는 스피커에 익숙해 있다면서 스피커를 통해 한 번 걸러진 소리는 우리 귀를 속이는 소리라고 이야기한다. 진짜 소리야말로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그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연주는 끝나지 않고 용인시 풍덕천동에서 왔다는 양미현 교수가 노래를 들려준다. 노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그치지 않고 계속 울려 퍼진다. 안산에서 지금 막 왔다는 윤한수 씨가 “…… 만경창파에 두둥둥 뜬 배 어기여차 어야디여라 노를 저어라”라며 노래를 부른다. 그는 노랫말을 바꿔가며 “너 떠났니, 너 떠났니, 오늘 떠나고 내일 또 떠나니.”라며 좌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곧이어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온 손영익 씨, ‘天?人?土’의 주인장인 최완 씨, 손일선 박사의 노래도 들린다. 시와 음악과 사진과 건축과 소설과 시각 예술을 하는 예술인들이 함께 모인 자리는 점점 더 무르익어 간다. 어느덧 자정이 넘어간 시간, 막걸리에 얼큰하게 취해 앞마당으로 나오니 모닥불은 점점 꺼져가고 밤은 더욱 깊다. (2004/11/24) 김태우 작가 ※ 이번 호로 ‘오산천 이야기’는 끝을 맺고, 다음 호에 ‘오산천이야기 연재를 마치며’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싣습니다. |
| 기사입력: 2011/05/24 [19:33] 최종편집: ⓒ 오산시민신문 |
# by | 2011/05/31 00:22 | 오산천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 39)여덟 번째 이야기-오산을 걷다(2) | |||
| 김태우의 오산천 이야기 | |||
| 문화예술회관에서 오산 시장까지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까마득한 제대를 기다리는 이등병의 기다림이 있어도, 혹은 특별한 기다림이 없을지라도 겨울은 이 도시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어느덧 올해도 열아홉 살이라는 ‘열정’에 빛나는 나이인 아이들은 대입시험을 치렀고, 다행히 이번에는 그리 날이 춥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난 번 비가 내린 이후로 좀 더 두툼한 옷을 걸쳐 입고 거리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사람이 그리운 날씨, 그게 바로 겨울이지 않나 싶다. 일을 끝내고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세상이 붉게 타고 있다. 이런, 눈을 들어 보니 공설 운동장 너머로, 그 뒤 시민회관 너머로 유달리 크고 붉은 태양이 지고 있는 게 아닌가.
친구를 만나 잠수교를 지난다. 낚시꾼들이 오산천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고 있다. 걷다보니 어느덧 남촌이다. 지하도를 건너간다. 까까머리 중학생 아이들이 가방을 둘러메고 웃음을 뿌리고 달려간다. 그들에게서 몽정의 냄새가 난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초입, 오늘은 장날이다. 김장철이라 부쩍 더 붐벼야 할 시장이 조용하다. 아무래도 외환위기 시대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생활고 때문이리라. 국민 생활이 힘들 때는 매운 음식이 잘 팔린다고 하는데, 요즘은 ‘불닭’이 유행이라며 친구가 귀띔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들어간 곳은 ‘경희네 통닭’이다. 통닭을 튀기고 있는 아줌마에게 “왜 이곳 이름에 경희냐”고 물어보니 “딸 아이 이름이 경희”라고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경희는 스물일곱이라고 한다. 지금 이곳, 오산 시장에서 경희의 이름으로 남편과 함께 장사를 시작한 지 19년이 되었다는 그녀의 모습에서 오산의 한 부분을 읽는다. 마늘 통닭이 테이블 위에 놓이고 친구의 잔에 소주를 따라준다. 이십대 후반이라고 불리는 날도 이제 2년이 남지 않은 친구는 이상과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며 체 게바라의 삶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싶다고 한다. 또래보다 졸업이 2년 정도 늦은 친구는 체 게바라의 말을 인용하며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사랑을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의 젊음과 나의 젊음이 이 도시에서 빛나는 열매를 보여주길 바라며 건배한다. 술값을 치르며 가게를 나오니 어느덧 해가 지고 도시는 어둑해져 있다. 친구와 내 얼굴이 붉게 물들어 아닌 밤중에 오산 시장에는 두 개의 해가 걸려 있는 것만 같다. 친구가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한다. 그에게 잘 가라고 말하며 ‘힘내’라고 조용하게 얘기해본다. 어쩌면 친구가 들었을지 못 들었을지 모를 ‘힘내’라는 그 얘기는 나에게 한 건지도 모른다. 오산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2004/11/19) 김태우 작가 | |||
| 기사입력: 2011/05/09 [18:51] 최종편집: ⓒ 오산시민신문 |
# by | 2011/05/15 13:27 | 오산천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 38)여덟 번째 이야기-오산을 걷다(1) | |||||||||
| 중원사거리에서 마장길까지 | |||||||||
| 중원사거리에서 마장길까지 중국에서는 춘절, 우리나라에서는 설이라 부르는 큰 명절이 지나고, 이제 정월대보름을 한 주 가량 남겨둔 오산 재래시장의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아무래도 오늘이 장날이 아니라는 것과 맞물려 사람들의 주머니가 착 달라붙을 정도로 얄팍해진 탓이리라. 중원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많이 보아야 중학생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군고구마 맛을 보고 가라며 소매를 붙잡는다.
예전에 시골 아궁이에 소여물을 쑤기 위해 풍로를 돌리며 왕겨를 한 움큼씩 집어넣으며, 그 속에 밤이며, 감자며 고구마를 넣던 추억이 떠오른다. 중원사거리 근처, 얼마 전에 증축한 성모외과 옆 LG전자대리점 골목으로 들어간다. 상가 앞 군데군데 공사 흔적이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이곳까지 차양막을 설치할 모양인가보다. 사람들도 거의 없는 시장에는 가는 곳마다 ‘임대 문의’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가는 걸음걸음이 무겁다. 이원규 시인을 만나러 ‘학이시습지 學而時習之’로 가는 길, 한참 가다 보니 오른편으로 성신목욕탕이 보이고 그 너머로 오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오산감리교회가 보인다. 지금 높이 솟아 있는 건물 앞에 있는 건물이 아무래도 오산의 역사와 함께 한 흔적이 아닐까 싶다. 교회를 지나 왼쪽으로 경희네 통닭에서 누릿한 기름 냄새가 난다. 그 거리를 지나 조금 걷다 보니 거리에 개고기 집들이 보인다. 가게 앞에는 부위 별로 잘린 개고기가 있다. 프랑스 배우 보르도는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을 일컬어 야만인이라고 했다. 진정 야만과 문명의 기준이 어디에 있으며, 그런 양비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는 그 여배우야말로 그렇다면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소설가 조정래는 중국에 가서 기름기 있는 중국 음식 때문에 고생했지만 다행히 개고기(본문에는 개장국이라고 나온다)로 속을 달랬다고 한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큰 폭력인가. 골목을 나오니 왼편으로 할머니집이 보인다. 4대째 대물림으로 설렁탕을 만드는 이곳은, 이제 할머니는 없고 그 아들이 자부심을 갖고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골목을 돌아가면 이원규 시인의 사무실이 나온다. 마침 내가 도착한 때가 저녁인지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곳에 함께 있던 <글길문학>의 원용 씨도 함께 동행한다. 사무실을 나오는 길, 이미 하늘은 어둠을 내리고 있었으며,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랑비가 되어 버린 빗방울. 비를 맞으며 마장길로 접어든다. 오늘은 날이 그리 춥지 않다. 아무래도 입춘은 진작에 지나갔고, 그러고 보니 우수도 며칠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며칠 후면 얼어붙은 대동강 강물도 풀리리라. 마장길을 지나 허름한 간판을 달고 있는 훈이네 식당에 들어간다. 인사성 밝은 주인이 우리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즐거운 웃음으로 맞는다.
인사와 함께 식당을 나오며 오산에서 가장 오래되고 70년대만 해도 장날이면 발 디딜 틈 없었다는 마장길로 나온다. 1번 국도로 나오는 길. 일제 때 지어진 듯, 삼각형 모양의 지붕을 덮고 있는 골목길을 지나간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재래시장의 중심지도 달라지고 대형 쇼핑몰이 들어선 오늘, 시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전처럼 서커스 구경이나 장소팔, 고춘자의 입담을 들을 수는 없을지라도 사람의 향기를 맡고 싶다. 언젠가 쨍하고 볕들 날, 기다리는 많은 시장 사람들에게 밝은 빛 비추어 햇살만큼 눈부신 웃음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 (2005/2/15) 김태우 작가 | |||||||||
| 기사입력: 2011/04/16 [17:47] 최종편집: ⓒ 오산시민신문 |
# by | 2011/04/27 03:24 | 오산천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 38)일곱번째 이야기- 장지천을 찾아서 3 | ||||||
박장철 효자각 장지천이 있는 샘물낚시터로 가는 길, 동탄농협 분소 옆에 위치한 박장철 효자각을 보게 되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위해 효자각 안에 있는 나무 현판에 적힌 문구를 보려는데 읽기가 영 불편하다. 효자문의 유래를 조금 고쳐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박장철은 1780년 5월 9일 박세형의 아들로 장지리에서 태어났다. 박장철은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반드시 부모님께 먼저 권하고, 부모님의 몸이 편찮으면 밤낮으로 걱정하며 간호했는데, 심지어 추운 겨울에도 부모님의 몸이 빨리 회복되길 찬물로 목욕하며 빌었다고 한다. 하루는 병석에 누운 아버지가 송이버섯과 쇠고기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시골에서 두 가지 모두 쉽게 구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송이버섯과 쇠고기를 사러 멀리 안성장까지 가야 했다. 새벽 일찍 걸었는데도 가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뿐 아니라 오는 데도 너무 늦어져 어느덧 사방은 고요해지고 어두워졌으며 길은 점점 더 험해졌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났다. 놀란 박장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뒤에는 스님 한 분이 서 있었다. 스님은 반갑게 인사하며 길동무를 하자고 했다. 먼 길을 함께 이야기를 걷다 보니 어느덧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박장철은 스님에게 “스님, 피곤하실 텐데 제가 사는 곳이 이곳이니 밤도 깊고 하니 오늘 하루 묵어 가시죠”라고 권했다. 하지만 스님은 극구 사양하며 “바쁘기에 돌아갑니다”라며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스님이 별안간 큰 호랑이로 변해 꼬리를 낮추고 슬금슬금 걸어간 곳이 지금의 대호밭이라고 한다.(오산시 궐동에 대호밭이 있으나, 장지리 사람에게 물어보니 장지리 산 66번지 건너편 산이 바로 전설에 나오는 대호밭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박장철은 스님이 호랑이로 변하다니 이상하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마워했다. 위험한 밤길을 지켜줬기 때문이다. 이후 박장철의 아버지는 아들이 안성장에서 사온 송이버섯과 쇠고기를 먹고 차차 병이 나았다. 그 후로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효성이 지극한 탓에 호랑이가 지켜주고 아버지 병이 나은 것이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나라에 흉년이 들고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웃집에 불이 나 하필 곡식을 쌓아 두던 박장철 집 뒷광까지 불이 번졌다. 박장철은 불을 끄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그러나 불에 머리카락이 타고 살이 데었으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불을 끄다 끄다 지친 박장철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탄식과 함께 맑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들었다. 그러더니 곧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해 불은 단번에 꺼져 버렸고, 이에 마을 사람들은 또 다시 놀라며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박장철은 어려서부터 공부도 열심히 했으며, 일도 부지런히 했다고 한다. 또한 집안 살림을 바르게 하고 모든 사람을 친절로 대했으며, 그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애정을 갖고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박장철 같은 사람이 한 마을에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러던 1828년에 또 다시 엄청난 흉년이 찾아들게 되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마을에 전염병까지 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흉년에 지친 까닭에 더 쉽게 병에 들었고, 굶주림 때문에 병이 쉽게 낫지 않았다. 그래서 박장철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사람들을 먹고 입게 했다. 그리고 누구도 곁에 다가가려 하지 않는 환자에게 다가가 손수 약과 음식을 먹이며 간호하고 위로했다. 때문에 쉽게 전염병이 퇴치되었다고 한다. 어느덧 세박장철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는 이웃 동리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찾아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고 통곡했다고 한다. 마침내 장례 날이 되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미 전 재산을 다 바쳐 빈털터리인 그를 위해 산소라도 잘 만들어 드린다고 흙과 떼를 떠다가 산소에 정성껏 입혔다고 한다. 박장철의 장하고 거룩한 일들이 근방에 화젯거리가 되고 있어 사람들이 의논한 결과 정부에 상신하여 곧 1885년 5월 1일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장지리에 효자문을 모시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할아버지의 효성스러운 정신을 본받아 지극한 자손이 되어야 함은 물론 또한 우리는 그 장하고 거룩하신 뜻을 고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1972년 3월 5일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부모와 이웃을 위한 마음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현재 박장철 효자각은 화성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72년 중수된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분명 과거의 ‘효’와 오늘날의 ‘효’는 분명 다를 것이다. 옛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지던 사람들이 본다면 오늘날 우리는 금수와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달라진 ‘효’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현재화 하기 위한 노력을 궐동에 있는 궐리사와 오산시청과 시민이 만들어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배우고 살 수 있는 것의 의미로…. 샘물낚시터에서 봉룡사까지 효자문에서 발길을 돌려 장지천이 있는 샘물낚시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 속으로 마구마구 파고들지만 한참을 걸은 탓인지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장심근해장국을 지나 작은 야산을 휘돌아 왼쪽으로 휘어진 장지천을 따라간다. 마을로 접어드는 오른쪽에 외할머니 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장지천 옆에 길이 없어 계속 하천을 밟으며 꾸불텅꾸불텅 걸어 올라간다. 오른편 위로 큰 건물이 하나 보인다. 김치회사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김치공장 반대편에는 연탄재가 가득 쌓인 비닐하우스 몇 개가 있다. 장지천의 발원지로 가려면 이곳을 지나 야산과 논 사이를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박 서방네 종중 산’이라 부르는 곳 앞을 지나 장지리 17번지에 위치한 축산 농가를 지나간다. 지나가는 길, 그 집에서 키우는 개들이 짖기 시작하자 마을이 온통 시끄럽다. 한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를 키우기 때문이다. 주인이 나와 개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자 바로 조용해진다. 주인에게 이곳이 어딘지 물어보자 장지리라면서 지금 이곳에 있는 마을을 제외하고는 화성시 동탄면 장지리 논밭에는 앞으로 아파트가 들어설 거라고 말해주었다. 이곳에도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천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봉룡사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장지천의 첫 번째 발원지다. 이곳에서부터 물은 흘러 흘러 또 다른 사건(물길)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오산천에 도착해 궐동천을 만나고 가장천을 만나 진위천이 되고 서해가 된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지워지고 또 새로 써질까. 나는 아직 모른다. (다음 회에는 여덟 번째 이야기 ‘오산을 걷다’로 찾아 뵙겠습니다.) | ||||||
| 기사입력: 2011/03/31 [19:18] 최종편집: ⓒ 오산시민신문 |
# by | 2011/04/27 03:21 | 오산천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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